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남명선조의 일대기

선조의 휘(諱)는 식(植), 자(字)는 건중(楗仲), 본관은 창녕(昌寧)이고, 남명은 선조의 호(號)이다. 선조의 증조부 안습(安習)은 생원이었는데, 이 때 비로소 서울로부터 경상도 삼가현(三嘉縣)으로 이주하게 되었다. 조부 영(永)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가세가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겠다. 부친 언형(彦亨)이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게 되고, 숙부 언경(彦卿)도 문과에 급제하니 이 때부터 가세가 떨치게 되었다.


선조는 1501(연산군 7년)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.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내다가, 7세 때부터 부친의 임지로 따라다녔는데, 그 시절에 정치의 득실과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눈여겨보게 되었다. 19세 때 산 속에 있는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조광조(趙光祖) 등의 죽음을 들었고, 또 숙부 언경도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, 어진 사람들이 간신 배에게 몰려 경륜을 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슬퍼하였다.
25세 때 과거를 위하여 절간에서 공부하다가, 원나라 학자 허형(許衡)이 "벼슬에 나아가서는 이룬 일이 있고, 물러나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. 벼슬에 나아가서도 이룬 일이 없고, 물러나 있으면서도 아무런 지조가 없다면, 뜻을 둔 것과 배운 것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?"라고 말한 구절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.

30세 때부터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(山海亭)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. 37세 때 어머니를 설득하여,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. 38세 때 이언적(李彦迪) 등의 천거로 헌릉(獻陵) 참봉(參奉)에 제수 되었으나, 나아가지 않았다. 45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,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이림(李霖), 곽순(郭珣), 성우(成遇) 등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화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벼슬할 뜻을 버렸다.

48세 때 고향 삼가현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(雷龍亭), 계부당(鷄伏堂)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. 48세 때 전생서(典牲署) 주부(主簿), 51세 때 종부시(宗簿侍) 주부, 55세 때 상서원(尙瑞院) 판관(判官), 같은 해 단성현감(丹城縣監)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. 선생의 상소 중 "대비(文定王后)는 진실로 생각이 깊지만 궁궐 속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, 전하(殿下)는 돌아가신 임금의 어린 고아일 따름입니다."란 구절은 조야(朝野)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. 명종(明宗)은 남명의 글이 공손치 못하다 하여 처벌하려 했으나, 산림처사가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책잡아 처벌하는 것은 언로(言路)를 막는 부당한 조처라는 조정 신하들의 변호로 무사하게 되었다. 이 때 벌써 선생의 명망은 조야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, 또 산림처사를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임금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. 온갖 부조리가 만연하던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선생의 과감한 직언은 산림처사의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.

61세 때 지리산 아래 덕산(德山)으로 옮겨 산천재(山天齋)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. 65세 되던 해 문정왕후가 죽고 곧 이어 윤원형이 관직에서 쫓겨나자, 을사사화 때 유배되었던 선비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. 그 이듬해 다시 임금으로부터 부름이 있자, 선조는 조정도 조금 맑아졌고 임금의 교지(敎旨)도 거듭 내리니 한 번 가서 군신의 도리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. 그리하여 서울로 가서 사정전(思政殿)에서 임금을 독대하였다. 명종이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, 선조는 '정치 제도를 혁신할 것, 인재를 등용하려는 성의를 보일 것, 정치의 근본이 되는 임금 자신의 학문에 힘쓸 것 등'을 건의하였다. 조정에는 윤원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축출되고 어진 사람들이 복귀하여 명종이 비로소 직접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, 선조는 평생토록 쌓은 학문과 경륜을 한 번 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. 그러나 명종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, 그가 무슨 일을 할 만한 임금이 아님을 간파하고는 서울에 간 지 7일만에 곧바로 돌아왔다.

67세 되던 해 어린 나이로 새로 왕위에 오른 선조(宣祖)가 즉위 초에 두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. 68세 때 역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, 역대 임금들이 나라 다스림에 실패한 사례를 지적하고서, '나라 다스림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 자신이 학문과 인격을 닦는데 있습니다'라는 상소를 올려 어린 선조가 정치를 잘 해 낼 수 있는 바탕을 닦도록 간언 하였다.

72세 때 선생은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. 임종시에 모시고 있던 제자 김우옹(金宇毋)이 "명정에 어떻게 쓸까요?"라고 물으니 선생은 "처사(處士)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."라고 대답하였다. 선조는 곧 예관을 보내어 제사지내고, 대사간을 추증하였다. 이어 광해군 때에는 문정공(文貞公)이란 시호(諡號)가 내려지고,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.
   
       
   
   
  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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